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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티모어 한국 순교자 천주교회

본당

성당 변천사

지금 우리가 신앙의 힘을 기르고 있는 이 곳 볼티모어는 미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곳입니다. 볼티모어는 200여 년 전인 1789년에 미국 최초의 교구로 설정이 되어 당시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주교로 승품이 된 John Carroll 주교님을 초대 교구장으로 맞았으며, 1808년도에 대교구로 승격되어 뉴욕, 필라델피아, 보스톤과 루이스빌에 속교구를 설정하고 다른 지역이 교구로 독립하게되는 시기까지 수 십 년 동안 미국 전 지역을 관장하는 대교구로써 활동하였고 그 유명한 '볼티모어 교리서(Baltimore Catechism)'는 근 200년 동안 미국의 유일한 교리서로써 수많은 새신자들을 교육하는데 사용되어 왔습니다.

한인 공동체의 시작

 

이러한 지역적인 특성을 가진 곳에서 1972년 7월 21일에 최 계환, 안 용구, 조 영희, 이 재성 형제님들이 모여 한인 성당의 설립을 논의하게 되고 같은 해 8월 6일에 안 용구 형제님을 초대 회장으로 뽑아 Johns Hopkins 대학에 유학을 오신 이 봉우 토마스 신부님을 모시고 15 가족이 모여 Loch Raven에 있는 Immaculate Heart of Mary 성당 부속 수녀원 Chapel에서 역사적인 첫 미사를 봉헌하게 됩니다. 이어 1973년에는 김 수환 추기경님이 오시어 미사봉헌을 하시며 박 유리안나 자매님께 최초로 영세를 주셨습니다.

이 봉우 신부님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고, 공동체는 약 2년 동안 상주 사제 없이 자체적으로 신앙심을 지키게 됩니다.  1975년 곽찬식 신부님이 부임하고 어느 듯 50여 세대로 신자수가 늘어나자  더욱 큰 성당이 필요하게 되고 1976년에 St. Bernard 성당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31일에 장 주민 발다살 신부님께서 부임하셔서 상주 사제로 머물며 공동체를 사목하시게 되었습니다.

 

 

날로 성장하던 우리 공동체는 1978년 4월 29일에 최초로 사목 회의를 구성하게 되고 오유섭 형제님이 첫 사목 위원장님이 되셨습니다.  구역편성과 교리반이 시작되면서 성 버나드 미국본당의 한 소수 단체로 내실을 다지며 교세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볼티모어 교구의 정식 한인 본당으로 승격

 

미국 본당에 소속되어 제한적인 활동을 하고 있던 우리 공동체는 지속적인 성장으로 공동체 규모가 커짐에 따라 독자적인 사목활동을 필요로 느끼게 되고, William Borders 대주교님의 허락을 받아 다른 성당으로 이전하여 독자적인 공동체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당 이전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성장과정에 있었던 우리 공동체는 교우들간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게 되고, 결국 소수의 교우들이 St. Ignatius 성당으로 떠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1986년 4월에 우리 공동체를 위해 열심히 봉사를 하시던 장 신부님이 가벼운 stroke을 일으키시어 은퇴하시고 지금 우리 본당 신부님이신 김 용효 요셉 신부님이 취임하시어 1988년 4월 3일 부활절에 첫 미사를 봉헌하시게 됩니다.  

김 신부님의 사목이 시작되면서 사목협의회와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새로 구성되고 회칙들이 설정되어 교구장님의 인준을 받게 됩니다.  구역이 22개 반으로 새로 편성되고, 레지오 쁘레시디움들이 계속적으로 창단되고, 신심단체들이 형성되고, 교무헌금을 봉헌하면서 공동체 예산을 무에서 십만불 단위로 끌어 올리며 공동체의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공동체가 성장하고 그 모습을 갖춤에 따라 공동체의 독자적인 사목활동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많은 교우들의 요청에 의하여 김 신부님이  한인 공동체를 미국 본당 소속의 하나의 소수 공동체가 아니라, 교구청 직속 공동체로 독립시켜주시고 독자적인 사목활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교구장님께 요청하였고, 교구장님의 허락과 함께 교구청의 실무자들이 파견되어 독립절차가 시작되었습니다. 교구청은 우리 공동체가 소속되어 있는 성 버나드 성당을 우리 한인 공동체가 인수할 것을 제안했고,드디어  볼티모어 교구설정 2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인 1989년 10월 1일에 김 용효 요셉 신부님이 성 버나드 본당의 본당신부로 임명되면서 성전과 학교 그리고 별관 및 사제관과 비품 일체를 인수 받았고,  보좌 주교이신 Ricard 주교님의 집전으로 본당 승격 미사가 봉헌되고 St. Bernard 성당을 Korean National Parish Church로 새로 등록함과 동시에 정식으로 한인 본당으로 승격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볼티모어에서 한국 미사가 시작된지 17년 만에 이루어진 축복이었고,  우리 공동체가 미주 지역 한인 성당들 중에서 는 최초로 한국인 본당으로 인정 받은 것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본당승격 축하 기념집을 발간하게 되며, 미국 보혈회 소속 송 안젤라 수녀님이 우리 본당 최초의 전교수녀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본당 형태를 갖추며

 

St. Bernard 성당을 인수한 우리는 한인 본당의 당당한 모습을 갖추기 위하여 새 출발을 다짐하게 됩니다. 1990년에 묵주기도 20만 단을 봉헌하고 1991년 5월에는 성모회의 도움으로 성모상 구입 및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또 성전 수리 및 보수 작업을 시작하여 모금된 23여만 불의 기금으로 성전 내부 페인트와 새 카펫 등으로 성전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냉 온방 시스템을 새로 설치하였습니다. 그 해 11월에 St. Bernard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윌리암 키일러 대주교님의 집전으로 손님 주교님들과 역대 본당 신부님들을 모시고 한미 합동 축하 대미사를 봉헌하였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집을 발간하였습니다. 교우 및 사목활동의 증가로 한국, 부산의 올리볘따노 분도 수녀원과 계약을 맺고 두 분의 수녀님을 전교 수녀로 모시기 시작하였고 계속하여 3년마다 새 수녀님들이 오셔서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전례활동을 돕고 계십니다

1992년 10월 4일에는 한인 성당 창립 20주년 축하 대미사를 주교님을 모시고 국악미사로 올리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기념집 발간과 묵주기도 20만 단으로 우리의 정성을 받쳤습니다. 이렇게 각종행사 및 기념집을 편찬하면서도 우리는 올바른 신앙심을 키우기 위해 1992년 12월에 제1차 은혜의 밤을 하였습니다.

 

2001년인 지금까지도 매 년 해온 이 행사는 3일 동안 치유와 내적 쇄신에 은총을 누리고 더욱 정성 된 마음으로 대림절을 시작하기 위함입니다. 한편 1993년 5월에 뜻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지난 1986년 가벼운 stroke으로 쓰러지시어 1988년에 은퇴하시기 전 까지 1976년부터 13년 동안 사목하시고 은퇴기간을 사제관에서 기도로 보내시며 매 주일 본당 신부님을 도와 미사를 함께 드리시던 장 발다살 신부님이 Memorial Hospital에서 선종 하시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 가셨습니다. 이에 교구장 William Keeler추기경님의 집전으로 장례 미사가 봉헌되고 Dulany Valley Cemetery에 모시게 됩니다.

 

​새성전 건축 계획

지속적으로 성장하던 우리 공동체는 원활한 신앙활동을 위해 더욱 공간이 필요하게 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요청을 받아들인 대교구장님의 명령으로 학교 건물로 사용되어오던 빌딩을 인수하려 하였으나 학교측의 반발로 이를 포기하고 1993년 새 성전 건축을 위한 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 성당 건축을 위해 성금을 모집하며 성모회에서는 바자회를, 복사단 어린이는 세차를, 본당에서는 차량 번호판 frame 판매 등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또 9월에는 성전 건립 회보 "성막" 을 창간하여 모금 운동에 박차를 기하였습니다.  건축 기금으로 약 60만불 모금하였고, 그 동안 성당 살림을 아껴서 모아두었던 비축금 약 30만불, 그리고 본당 별관(마리안 하우스)을 처분하여 받은 금액 약20만불을 합쳐서 약 백만불을 성당 건축기금으로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우들이 귀중한 주보를 보관하기를 격려하고 돕기 위해 각 가정에서 모은 주보를 책으로 만들어 주며 교우들의 영성생활을 돕는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995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건강상 문제로 연기되었던 볼티모어 방문이 실행되어 10월 7일 오전 9시 30분에 Camden Yard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우리본당에서는 10명의 신자가 한복 착용을 하고 미사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렸고 그 외에도 122명의 다른 신자들도 멀리서 나마 교황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St. Lwarence 성당으로 이사를 가고, 한인 본당 명칭을 Holy Korean Martyrs Catholic Church로 바꾸다

우리들의 성당부지를 찾던 중 70번과 32번 교차로 부근 농장 36여 에이커의 성당 부지를 계약(75만불)하였지만 교구청의 방침변화로 성당부지를 교구청에 양도하고 대지 10에이커에의 성당건물과 학교 건물,  수녀원 건물과 사제관을 겸비하고 교통도 편리한 벨트웨이 근처의 St. Lawrence 성당을 무상으로 인수 받게 됩니다. 10월 7일 성 버나드 성당에서 마지막 미사를 드리고 미사 후에 이사짐을 모두 옮겼습니다.

 

드디어 우리들의 기도와 정성 그리고 하느님의 인도로 1997년 10월 12일에 현재 우리가 있는 St. 로렌스 성당에서 뉴먼 주교님을 모시고 새 성당 봉헌 및 창립 25주년 대 미사를 올리고 볼티모어 한국 순교자 천주교회 (Holy Korean Martyrs Catholic Church) 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둥지를 틀게 됩니다. 그리고 사제관 뒤의 개인집을 인수하여 정식으로 수녀원으로 축성식을 갖고 지속적으로 사목을 도와오신 두 분의 수녀님을 이 곳에 모시게 됩니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본당 수호 성인인 한국 순교자 대 축일 9월 20일을 본당의 날로 정하고 9월 순교자 성월을 본당의 달로 정하게 됩니다. 또한 같은 해 8월 30일에는 김 수환 추기경님이 찾아 주시어 미사를 집전해 주셨습니다.

 

1999년에는 대구 대교구 사제로써 Administrator란 명칭을 갖고 사목 해오시던 김 요셉 신부님이 볼티모어 교구에 입적 수속을 마치시고 이곳 볼티모어 소속 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김 신부님이 Installation of Pastor (본당 신부 착좌식) 통하여 본당 신부님 되심으로 공동체는 본당 신부님을 갖고 보다 성숙한 교포교회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이어 2001년에는 지난 1997년 12월에 우리 본당 역사상 처음으로 수도자 입회를 하셨던 김 혜정 데레사 자매님이 역시 미국 첫 한인 수녀회인 성 가정의 작은 수녀회에서 9월 15일에 허원식을 하시고 수도자가 되셨습니다. 

또한 9월 23일에는 신유박해 200주년 특전 미사를 국악으로 봉헌하는 동시에 김 사비나 자매님께서 모두 직접 제작하신 한국 순교 성인들의 순교 장면들을 그린 성화를 성당 복도에 전시하여 순교 정신을 묵상하였습니다.

이렇게 꿈에도 그리던, 우리에게 너무나 흡족하고 요긴한, 12에이커의 아늑한 터전으로 옮겨 우리의 아름다운 보금자리를 꾸미면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신앙을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많은 소공체의 재 구성, 레지오 마리에, 성가대, 기도회, 청년회, 연령회, 요셉회, 바오로회, 사도회, 대건회 등 많은 단체들이 생겼으며 미래의 본당 주역이 될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한글학교, 주일학교 등을 만들고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또한 매년 새로운 신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영세를 주고 각종 피정을 개최하고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또 2001년부터는 성당 건물 하나를 피정의 집으로 만들어 본당에서 직접 청소년 피정 등을 하며 수도자 육성에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1972년부터 시작된 우리들의 하느님을 향한 발걸음은 이렇게 30년이라는 세월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깊은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볼티모어 천주교와 함께 앞으로 50년, 100년 아니 영원히 이어져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지금까지 잘 지켜온 이 성전을 더욱 알차게 일구기 위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인 사랑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하느님의 뜻에 어울리는 성전을 꾸며야 하겠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이 순간에도 우리들의 믿음의 시간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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